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문단 편집) === 분석 === ||<-4> '''무소속 당선자들의 복당이 가능한 이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의 의회 구도'''[* 무소속의 경우 민주계 4석. 보수계 12석.] || ||<-2> [[민주당계 정당|민주당계]] 98석 ||<-2> [[대한민국 보수정당|보수정당]] 201석 || || '''[[새정치국민회의|{{{#white 새정치국민회의}}}]]''' || [[통합민주당(1995년)|{{{#white 통합민주당}}}]] || '''[[자유민주연합|{{{#ffffff 자유민주연합}}}]]''' || '''[[신한국당|{{{#ffffff 신한국당}}}]]''' || || 80석 || 18석 || 52석 || 149석 || 개헌저지선인 100석 확보는 물론 제1당 등극까지도 노리고 있었던 [[새정치국민회의]]는 기대에 영 못미치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1985년 총선 이래로 (야권분열로 패배한 1991년 지방선거를 제외하면) 대부분 민주당이 우세하던 서울에서 고작 18석을 확보하는 데 그치면서 여당인 [[신한국당]](27석)에 밀린 것이 가장 큰 원인인데, 특히 [[정대철]], [[조세형(정치인)|조세형]], [[김덕규]], [[한광옥]], [[김병오(정치인)|김병오]], [[장석화]], [[박실]], [[이원형(1933)|이원형]] 등 서울에 지역구를 두고 있던 중진급 정치인들이 대거 낙선한 것은 뼈아팠다. 이는 야권분열로 수도권 30여개 지역구에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 후보가 출마하면서 민주당계 지지층의 표가 분산된 결과라는 분석이 많았다. 다만 통합민주당이 선전한 지역에서는 국민회의-민주당간의 1~2위 다툼이 벌어져 대부분 국민회의 후보가 당선된 반면[* 통합민주당 [[이부영]] 후보가 당선된 서울 [[강동구 갑]] 제외.], 통합민주당의 지지율이 낮은 지역에서는 국민회의 후보도 꽤 큰 폭으로 졌으므로, 결과적으로 통합민주당이 중도 성향의 무당층이나 신한국당 지지층을 잠식하는 제3당 효과를 어느정도 냈다는 분석이 훗날 나오기도 했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5082|#]] 그리고 애초에 그 통합민주당은 불과 1년 뒤에 [[새정치국민회의]]가 아닌 [[신한국당]]과 합당했다. 물론 그런 점을 감안한다 해도 1년전의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을 기초단체장과 광역의원 수에서 앞섰고, 신한국당이 선전했다지만 득표율은 34.5%를 차지하는데 그쳐 지방선거 때보다 득표율이 내려앉았고, 또한 민주당이 지방선거 때의 득표율 32%를 지켰으면 원내 1당을 차지하기 충분한 수치라는것을 생각하면 뼈아픈 결과는 맞다. 한편, 재야사학자 임영태는 이 결과가 야권 분열 뿐만 아니라 중산층의 보수화 때문이라는 색다른 관점도 제시했는데, 여권이 당선된 곳이 유독 아파트 밀집 지역에 집중됐다는 것이 추론의 근거. 과거엔 가방끈 긴 중산층이 야당 성향이었으나, 시대가 [[3당 합당|변하면서]] 중산층들의 전반적인 의식 또한 바뀌어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적 심리가 크게 작용하게 되었다는 논점이다.[* 물론 이는 [[상도동계]]를 비롯한 일부 민주당 세력의 우파 진영 이동(이른바 자유주의 우파)도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 결과적으로 야권 분열을 초래한 김대중 총재의 국민회의 창당에 대해 당시 상당수 지식인 및 개혁 성향 인사들은 이를 냉담하게 봤고, 투표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과거엔 야권 분열 시 당선 가능 후보에게 전략적으로 투표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때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었다. 서울의 경우는 개혁 성향 민주당 인사가 출마해서 국민회의에 전략적으로 표를 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야권 표가 국민회의와 민주당으로 찢어져 신한국당 후보가 대거 [[어부지리]]를 얻었는데, 이 때문에 신한국당에선 "모순적이게도 여당 서울 승리의 최대 원군은 DJ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렇듯 서울 지역의 야당 참패 뒤엔 야권 분열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정치권 신진대사 및 변화를 바라는 갈망이 작용한 것이다. 심지어 대구, 대전, 강원, 경북, 경남, 제주 등 8개 지역에선 단 한 석도 얻지 못해 DJ의 대권 가도에 적신호가 켜졌다. 실제로 야권 분열로 인한 호남 출신 야당 고정표도 당시 총선에선 야권 분열로 인한 혼돈으로 국민회의에 그리 모이지 못하고 분산되는 모습을 보여줘 호남표도 예전같지 않다는 비아냥을 들었던 총선이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4160020910400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04-16&officeId=00020&pageNo=4&printNo=23169&publishType=00010|96 총선 호남표 표심 분석(동아일보)]]]. 국민회의는 비례대표(전국구) 선거에서도 불과 1% 가량의 득표율 미달로 13번까지만 당선되면서 14번이던 김대중 총재가 낙선하는 씁쓸한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하지만 김대중 총재는 이러한 선거결과를 놓고 유례없는 자화자찬에 들어갔다. > “이번 선거에서 왜 모든 언론은 국민회의가 패배했다고 보도하지요? 패배가 아니라 '''약진'''이란 표현을 쓰라고 언론에 요구하세요. 65석이 79석이 됐고 전국 58개 지역에서 3000표 차 이내의 초접전을 벌였는데 이게 민심이 아직 국민회의를 안 떠났다는 의미가 아니고 뭡니까. (중략) '''신한국당이 170석에서 139석으로 준 것이 이긴 것이냐, 국민회의가 65석에서 79석이 된 게 진 것이냐''', 뭐가 패배고 승리냐, 이걸 기조로 당 기자실에서 성명을 발표해주세요.”[[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ctg=10&total_id=5624212|#]] 물론 이는 선거 전체로 볼 때 [[허세]]가 섞여있는 [[정신승리|억지성 발언]]이었지만, 정신승리할 핑계는 되어 결과적으로 위기에 빠진 지지층을 추스르는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한편, [[김종필]]이 [[민주자유당]]에서 쫓겨나다시피 하면서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은 충청권 28석 중 24석을 싹쓸이하고 [[박준규(1925)|박준규]], [[김복동]], [[박철언]] 등 反YS 민정계 인사들이 출마한 [[대구광역시]]에서도 13석 중 8석을 획득하고 패한 지역구들 중에서도 3곳에서는 수백표차로 석패하며 선전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불었던 자민련 바람이 경북에서는 일어나지 않아 의성군과 경산시-청도군 2석에 그쳤다. 그나마도 다자구도 하에서 어부지리를 얻은 결과여서, 경산-청도에서 당선된 자민련 [[김종학(정치인)|김종학]] 의원은 10명 넘는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득표율 24.2%에 380표 차로 현역의원 [[이영창]]을 간신히 이겼고 의성군에서 당선된 [[김화남]] 의원도 현역 김동권 의원이 공천탈락 후 무소속 출마한 덕을 보았다. 총선 이후 김화남 의원은 자민련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머물다가 1998년 초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경기도에서도 구도심([[수원시]] [[장안구]], [[안양시 만안구(선거구)|안양시 만안구]]) 또는 농촌 지역([[평택시 을]], [[오산시]]-[[화성시|화성군]], [[파주시]])을 중심으로 당선자를 추가하면서 50석으로 대약진하며 이번 선거 최대 승자로 등극했으며, 이는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YS가 이끌던 [[통일민주당]]을 제외하면 제3당으로는 최대 의석을 확보한 것이었다[* 다만 통일민주당은 의석이 아닌 득표율로만 따지면 당시 제2당이었다. 참고로 이 선거 이후 제3당이 가장 약진한 사례는 이로부터 20년 후인 2016년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이 38석을 얻은 것이었다.]. 다만 이후 대구 지역의 경우 정치적 맹주가 없어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DJP연합]]이 이뤄지며 다음 총선인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다시 [[한나라당]]에게 제 1당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은 [[울산광역시|울산시]], [[안동시]] 등 영남권에서 3석을 얻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서울에서 [[이부영]]만이 당선되고 부산에서는 [[이기택]] 대표를 비롯한 전원이 낙선한 결과, 의석 수가 30석에서 15석으로 반토막나면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고 군소정당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선자 3명이[* [[이규택]](경기 여주), [[황규선]](경기 이천), [[최욱철]](강원 강릉 을).] 신한국당으로 이적하고, 이기택계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계열이 분열하면서 사실상 분당 상태에 이르게 된다. 무소속 역시 경남지역에서 당선자를 많이 배출하긴 했으나 이마저도 신한국당 공천에서 탈락한 친여 인사들이었고, 이들은 당선 후 신한국당으로 넘어갔다. 여당인 [[신한국당]]은 김영삼 전 대통령 지지율 하락으로 고전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꽤나 선전했는데, 모래시계 검사로 떴던 [[홍준표]], 민중당 출신의 운동권 인사였던 [[이재오]], [[김문수]] 등 당시만 해도 참신하다고 평가받던 정치 신인들을 수도권에 대거 공천하고 야권 분열의 어부지리를 얻으면서 당초 예상보다 선전한 139석을 확보한다. 특히 서울 지역에서 47개 선거구 중 27석을 확보해 여대야소 현상을 만든 것은 보수계 정당에선 특기할만한 성과였다. 심지어 혼전 선거구였던 경기 북부지역도 북한군 비무장지대 무력시위 등 '북풍'이 작용해 신한국당이 휩쓸었고, 국민회의 텃밭이던 호남 지역에선 강현욱(군산 을), 자민련 텃밭이던 충남 지역에선 이완구(홍성)가 각각 당선해 일단 교두보를 확보했다. 물론 아래에 나와있듯이 출구조사가 너무 압도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실제 그것보다 많이 부진한 개표 결과를 보고 나서는 1당이 되고도 찜찜해졌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다만 대구 지역의 참패는 골 아플 만 했는데, YS정부의 [[전두환]], [[노태우]] 구속 역풍 등이 겹치며 자민련 후보가 득세해 서구을에선 강재섭[* 이마저도 자민련과 무소속 후보들의 표 분산으로 인해 30%대 득표율로 신승한 결과다.], 달성에선 김석원이 뽑힌 게 전부이고, 경북/경남에서는 1당은 되었으나 [[포항 북구]]에 옥중출마한 [[허화평]], 전두환 정권 시절 민정수석을 지낸 [[밀양시]]의 [[김용갑]] 등 무소속 후보들에게 일부 의석을 내주면서 원내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는 훗날 신한국당의 후신인 [[한나라당]]이 [[박근혜]]를 정계에 컴백시키는 등 전반적으로 당이 다시 보수화되는데 한 원인이 된다. 게다가 별탈없이 치러진 전년도 지방선거와 달리 관권 선거, 금품 살포 분위기도 만연했기에 정치개혁입법 취지를 무색케 만들었다. 그래도 무소속까지 흡수해 과반수 넘는 의석을 확보한건 다행이었으나, 야당의 반발로 원 구성도 못해 한동안 국회는 파행으로 치닫게 된다. 선거 직후 결과는 여당 139석, 야권 144석, 무소속 16석(12석은 영남 지역 무소속)의 절묘한 의석 배분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만 끝났다면''' 이 총선은 그다지 회자되지 않았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